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총성 없는 전쟁터’입니다. 그 어느 산업보다 기술력이 크게 좌우하는 업종이고, 이에 각사들이 막대한 투자를 벌이기 때문입니다. 미세공정 기술이나 수율 관리, 설계능력 확보 등에서 그야말로 ‘한 끗’ 차이로 순위가 뒤바뀝니다. 글로벌 반도체 유력회사들이 매해 공장을 짓고 R&D를 하는 데 수조원에서 수십조원을 들이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새 반도체 시장에 기술력과 무관하게 주목받는 분야가 있습니다. 12인치 웨이퍼의 등장과 함께 2000년대 중반부터 한물간 기술로 취급되던 8인치(200밀리미터) 웨이퍼입니다. 한때 ‘퇴출당할 수 있다’는 소리까지 듣던 8인치 웨이퍼 기반 반도체가 재도약에 성공한 것입니다.
8인치 시장의 부활로 웃는 기업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국내 몇 안 되는 8인치 시스템 파운드리 회사 DB하이텍입니다. 올해 상반기 매출은 4675억원으로 지난 한 해 거뒀던 8074억원의 57.9%에 해당하는 돈을 벌었습니다.
더 눈에 띄는 건 영업이익인데요. 상반기 1418억원의 영업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 717억원보다 무려 197.8% 많습니다. 매출 증가 폭에 비해 영업이익 증가 폭이 넓다는 건 그만큼 마진율이 크게 개선됐다는 의미겠죠. 이에 DB하이텍의 상반기 영업이익률은 30.3%에 달했습니다.
호실적의 기반에는 끊이지 않는 수요가 있습니다. DB하이텍이 운영하는 부천 공장과 상우 공장의 지난 상반기 가동률은 98.68%, 97.32%였습니다. 사실상 공장이 쉬지 않고 가동됐다는 의미로, 이에 총 생산 가능량 73만2000장 중 71만6643장을 찍어냈습니다. 수주 잔고도 8만8000장으로 견조하고요.
8인치 시장을 대하는 대형사들의 움직임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용인 기흥 8인치 전용 라인의 월 생산규모를 20만 장에서 10만 장 더 늘렸다고 합니다. 지난해 3월 8인치 파운드리 제품을 기존 4종에서 지문인식 센서와 무선통신(RF) 칩 등 두 종류를 추가 확대했는데 이와 관련한 투자로 풀이됩니다.
SK하이닉스도 관련 투자를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 장쑤성 우시 시 정부와 합작해 ‘하이스타스 반도체’라는 이름의 회사를 만들어 공장을 짓는 중인데요, 이곳에 계열사 SK하이닉스시스템IC에서 운영하던 청주 M8 공장 장비를 이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중국 내 늘어나는 아날로그 반도체 시장을 공략하는 차원의 움직임입니다.
지난 3월 키파운드리로 이름을 바꾼 매그나칩 반도체 청주 공장 지분을 매입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됩니다. 키파운드리는 8인치 웨이퍼 파운드리 업체로 잘 알려졌죠. 월평균 9만 장을 생산할 수 있고 관련 특허도 1700건 가량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SK하이닉스는 주요 출자자로 300억원을 투자했는데 향후 시장 상황에 따라 회사를 인수할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최근 들어 8인치 웨이퍼 공정에 투자를 한 상태다.
8인치 웨이퍼 기반의 반도체 시장이 이처럼 반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8인치 웨이퍼가 12인치 웨이퍼에 비해 갖는 약점이 최근 들어 강점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최근 반도체 시장의 변화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웨이퍼에서 8인치와 12인치는 단 4인치 차이로 생산량에서 2.25배 차이가 납니다. 12인치 웨이퍼로 작업할 때 칩 당 제조 원가가 크게 줄어들며, 이는 8인치 시장이 2000년대 들어 급속도로 작아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12인치 웨이퍼 시장이 커지자 관련 공정 장비 기술도 모두 12인치에 쏠렸습니다. 상대적으로 8인치 웨이퍼로 칩을 만들 수 있는 공정 장비들의 기술력이 떨어지게 되고, 어느 시점부터 이들 장비를 만드는 업체들도 거의 없어졌다는 게 반도체 업계의 설명입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8인치가 갖는 장점이 드러납니다. 대량 생산이 수반되는 메모리 반도체와 다르게 시스템 반도체는 워낙 종류가 많고, 이에 많이 찍어내는 것보단 여러 개를 다양하게 찍어내는 ‘다품종 소량생산’이 필요한데요. 덜 찍어도 되면서 12인치보다 비용도 덜 드는 8인치 웨이퍼가 주목받게 된 것입니다.
IT기술의 발달과 함께 반도체 파운드리 시장 생태계는 다변화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스마트폰 시장이 커지면서 카메라 모듈에 들어가는 이미지센서(CIS)나 지문인식 센서, 가속도 센서, 터치스크린 칩, 무선통신(RF) 칩 등이 필요해졌죠. 이것들은 메모리 반도체처럼 많은 칩이 필요한 게 아니며, 이에 대량생산에 적합한 12인치보다 8인치에 맞습니다.
사물인터넷(IoT)이나 5세대 이동통신, 자동차 자율주행에도 반도체 수요가 크게 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고도의 기술력이 요구되는 첨단공정 기반 반도체와 상대적으로 기술력이 덜 필요한 중저가 반도체 시장이 조성됐습니다. 8인치 웨이퍼 기반 반도체 시장이 성장한 이유입니다.
반도체 업계 전문가들은 향후에도 8인치 시장의 성장이 계속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 자료에 따르면 8인치 웨이퍼 반도체 생산은 2015년 500만 장에서 지속적으로 늘어 2022년 650만 장에 이를 전망입니다. 10여년 전 8인치 웨이퍼가 사라질 것이란 시장 전망과 정반대입니다. 대만 파운드리 업체인 뱅가드(VIS)도 최근 컨퍼런스콜에서 코로나19 상황과 무관하게 8인치 시장은 적어도 내년까지 호황이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경쟁사가 더 늘어나기 어렵다는 구조적 상황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말했듯 8인치 웨이퍼 전용 공정 장비를 만드는 회사들이 크게 줄어들었고, 첨단공정에 좌우되는 업계 상황상 8인치 장비 회사가 더 나오긴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에 결국 지금 남아있는 8인치 기반 파운드리들이 계속 승승장구할 것이란 계산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시스템 반도체 제품 종류가 계속 늘어나는 만큼 소량의 반도체를 찍어내는 8인치 웨이퍼 파운드리 수요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라며 “12인치 웨이퍼로도 반도체 생산에 충분해 15인치 웨이퍼로 넘어갈 필요가 없다는 점도 8인치가 지속될 수 있는 이유”라고 설명했습니다.
종합하면 8인치 웨이퍼 기반 반도체 시장은 향후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일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15인치 웨이퍼가 보편화돼 12인치 시장을 대체한다면 8인치 웨이퍼는 없어지겠죠. 다만 15인치로 도약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만큼, 8인치 반도체 시장은 당분간 안정적으로 유지된다고 반도체 업계는 전망하고 있습니다.